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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1783년 몽골피에 발룬의 비행 후 유럽 각국에서는 발룬의 제작과 비행이 확산되었다. 발룬의 빌행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규제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에 족한 소란을 야기하였다. 몽골피에 발룬의 비행이 있기 몇 달 전 프랑스 물리학자 Gharles가 수소로 채운 발룬을 사람을 태우지 않은 채 띄워 올렸는바, 이 발룬이 상승 후 구름 밑으로 하강하여 Gonesse라는 조그마한 농촌 근처에 착륙한 것을 본 주민 들은 하늘에서 괴물이 내려온 것으로 알고 농기구를 동원하여 발룬을 공격하여 갈기갈기 찢은 후 말에 묶어 끌고 다니면서 산산조각을 낸 사건이 있었다. 아마 이 사건이 가장 처음 발생한 항공기에 대한 불법 방해가 아닌가 본다. 동 사건 후 약 200년이 지난 후 ICAO가 불법방해위원회를 구성하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위와 같이 아무런 제어도 없이 방기 된 발룬은 1784년에 영국, 이태리, 스케인, 그리고 미국에서도 나타난 현상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사람을 시은 발룬의 비행이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에서도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비행은 유럽의 경우 특히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기 십상이었다. 이에 따라 발룬의 출발 시는 물론 점차 발룬의 비행 목적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 정부 지도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대륙의 모든 동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영국인들은 1785년 Blanchard와 Jeffries가 발룬을 타고 순풍 방향으로 영국의 Dover에서 프랑스의 Calais로 비행, 영불해협을 건너간 데 대하여 경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각국 법률가들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발룬의 비행에 대한 규제의 필용성을 느꼈으며 당시 저명한 사립단체인 국제법 현회는 1880년 영국 Oxford에서 개최된 모임에서 항공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였다. 또한 정부 간 차원에서 1889년 프랑스 정부가 만국박람회 개최와 때를 맞추어서 최초의 국제 항공회의를 파리에서 소집하였으며 동 회의에 브라질, 프랑스, 영국, 멕시코, 러시아, 미국 등이 참석하였다.
항공기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목적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정찰, 군인 및 군용물품의 수송, 기상관측, 통신, 수색 구조를 위한 항공기의 역할은 경이적이었다. 1870~1871년 프러시아 프랑스 전쟁 시 양국 모두 발룬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중 Bismarck는 1870.11.19. 자 프랑스 정부에 대한 외교서한을 통하여 프랑스 군대가 발룬을 타고 프러시아 점령지역(원 프랑스 영토)으로 비행할 경우 동 군대가 전선 배후에서 군사작전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를 전달하였다. 이 경고는 air space에 대한 주권을 처음 주장한 것으로서 당시 법 인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899년 제 1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가 발룬과 또는 유사한 항공기구로부터 총포류의 발사를 금지하는 선언을 조약으로 채택하였다. 1902년에는 국제법 협회의 요청에 따라 Fauchille이 처음으로 항공법을 기초하였다.
1907년에 제 2차 헤이그 국제 평화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이때는 1899년의 평화회의에서와 같은 열정을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발룬의 국경침해는 계속되었는바, 프랑스 상원은 이를 우려한 나머지 1908년 11월 장시간 토의 끝에 월경이 가져오는 국방 및 국제 상업관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은 있은 직후 독일에 주재하는 프랑스 대사는 독일 정부에 프랑스 상원의 우려를 전달하였으며 독일 정부는 추후 프랑스 영토로 가는 발룬 비행을 줄이겠다고 약속하였다. 연후 프랑스 정부의 관심이 계속되어 프랑스 정부는 1909년 12월 21개 유럽 국가에 대해서 유럽에서의 항공규제를 논의하기 위한 1910년의 파리 외교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하였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계속되는 월경에 대처하기 위하여 1909년부터 프랑스 내로 날아오는 발룬을 억류하여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동 발룬 비행의 구체적인 내용을 중앙정부에 전문 보고하도록 지방정부에 지시하였다.
#2 1910년 파리 회의
러시아를 포함한 19개 유럽국가가 모인 파리 회의는 공 비행기와 사 비행기의 구분, 비행기 국적, 항행 증명서, 등록, 승무원 자격, 이착륙 규칙 등을 토의하였으나 핵심의 문제인 타국 영토 위에서의 비행 권리와 특권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동 핵심문제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추후 1919년의 파리 협약에 큰 참고가 되었는바 이 중 장래 항공법 발전분야를 예견한 몇 가지 점을 기술하겠다.
이태리는 군사지역에 타국 비행기가 착륙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영토국이 해양에서와 같이 배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정한 항공 구간을 territorial zone으로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다. 프랑스는 자국 학자 Fauchille의 견해를 반영하여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손상되지 않는 한 모두에게 항행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조종이 가능한 비행기구를 상업용으로 개발할 정도까지 항공에서 선두 발전을 하고 있던 독일은 회의 토의용으로 43조와 2개의 부속서로 구상한 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사용 가능 영공에 대한 영토 국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체약국이 타 체약국의 영토에서 이륙, 착륙 및 영공 통과 등의 소위 '무해 통항'의 권리를 허용하는 독일 안은 프랑스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겠다. 한편 영국은 영공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주장하는 반면 평화 시 외국 비행기의 무해 통항권은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및 독일과는 달리 영국은 국가안전상 국내 비행기와 외국 비행기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회의는 좌절되었다.
5.18부터 6.29까지 계속된 동 파리 회의는 독일이 기초한 협약안을 중심으로 퇴의하였으나 영국이 국가보안상 외국 항공기를 자국 민간항공기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입을 고수함으로써 실패로 끝났지만 동 문제 조하 안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협약안을 성안 하였으며 이는 후일 1919년의 ㅍ리 협약, 그리고 1944년 시카고 협약의 중요한 바탕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 회의임에 유의해야겠다. 한편 각국은 이때까지 민간항공기의 자유비행을 허용하는 입장이었으나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러한 입장은 폐쇄적인 방향으로 정립되고 운영되기 시작하였다.